| ▲ 박지원 국가정보원 원장이 2020년 7월29일 청와대에서 신임 통일부 장관·경찰청장과 함께 임명장을 받은 뒤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첫줄 왼쪽부터) 김창룡 경찰청장, 이인영 통일부장관, 문재인 대통령,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
△과거 국정원의 불법사찰 및 정치개입 사과
박지원은 국정원의 과거 불법사찰 및 정치개입과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박지원은 2021년 8월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저와 국정원 모든 직원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엄중한 명령을 받들어 과거 국정원의 불법사찰과 정치개입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원에 대한 정권의 부당한 지시는 없었다"며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저와 국정원 전 직원은 철저한 정치 거리두기를 실천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고발청부 사건과 관련해 제보자인 조성은씨와 사전에 만난 일을 두고 제보를 사주했다는 야당의 공격에 휩싸이며 곤혹을 치르고 있다. 자칫 그동안 쌓아온 정치 중립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고발청부사건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총장 재임 당시 대검 검사가 야당인 국민의힘 쪽에 검찰 고발을 청부했다는 언론보도로 촉발돼 2021년 10월 현재 공수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박지원은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뒤 줄곧 정치중립을 강조해왔다.
박지원은 2020년 12월16일 열린 권력기관 개혁 법률안 의결 합동 브리핑에서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다"며 "5·18, 세월호, 댓글사건, 민간인 사찰 같은 국정원 관련 의혹이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도록 진상규명에도 끝까지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2021년 7월에도 취임 1년을 앞두고 직원들에게 정치중립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졌다.
앞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2021년 2월18일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이뤄진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야당의 협조를 촉구했다.
그리고 김경협 국회 정보위원장은 같은 해 2월23일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비정상적 수집 문건이 약 20만 건에 이르며 사찰 대상자 수는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결국 같은 해 7월24일 국가정보기관의 불법사찰 정보를 공개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의 국회 특별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본 총리와 만나 징용·납치문제 논의
박지원은 일제 징용 노동자 배상문제 등 한일 갈등 외교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2020년 11월9일 자민당 간사장인 니카이 도시히로를 만나 한일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은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에도 당시 운수성 장관이던 니카이 도시히로와 한일 관광교류, 항공 증편문제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NHK에 따르면 니카이 도시히로 장관은 박지원과 만난 뒤 "매우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충분히 신뢰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1월10일 박지원은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총리를 만나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문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북한의 위임통치 보고
박지원이 국정원장에 오른 뒤 국정원은 북한 정세와 관련해 국회에 보고할 때 ‘위임통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2020년 8월20일 국정원의 비공개 보고가 끝나고 기자들을 만나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국정 전반에 위임통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국정원이 했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여전히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김 부부장에게 일정 부분 권력을 나눠주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여기서 위임통치라는 말이 김 위원장의 권력을 김 부부장이 승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 오해가 빚어지기도 했다.
△국정원장 임명
박지원은 제 21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잠시 야인생활을 했지만 곧바로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원래 박지원은 정계에서 은퇴한 뒤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으며 간간히 방송활동 등을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을 국정원장으로 지명하면서 박지원은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박지원은 과거 국민의당에 몸담을 때 문 대통령을 거세게 공격했던 전력이 있는 데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송금특검으로 수감생활을 한 적도 있어
문재인 정권의 핵심 세력인 ‘친노친문’과 사이가 껄끄러운 편이다.
문 대통령의 박지원 인선이 다소 뜻밖이라는 평가도 이 때문에 나왔다.
남북관계가 교착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남북대화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임명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모종의 역할을 맡길 것이란 풀이가 나왔다.
'비문'을 넘어
안철수 후보를 내세워 문 대통령에 맞선 박 전 의원을 지명한 것은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국정원의 정치관여 논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이 담겼다는 일각의 해석도 있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2020년 7월3일 기자회견을 열어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며 현정부에서도 남북문제의 자문역할을 하는 등 북한 전문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강 대변인은 이어 “오랜 의정활동에서 축적된 다양한 경험과 뛰어난 정치력, 소통능력을 바탕으로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의 본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는 한편 국정원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보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박지원은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거쳐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박지원은 2020년 7월29일 국정원 청사에서 열린 제35대 국정원장 취임식에서 “북한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길어지는 가운데 강대국들의 패권경쟁 심화 등으로 안보상황 유동성이 커지고 있다”며 “국가안보를 지키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물꼬를 트겠다”고 말했다.
| ▲ 박지원 국정원장이 2020년 11월11일 오후 일본 방문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취재진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
△21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박지원은 호남계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제 21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박지원은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을 떠난 뒤 민주평화당에서 활동했는데 민주평화당은 곧 정동영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와 박지원 등 비당권파 사이 갈등이 커지며 분당절차를 밟게 됐다.
결국 박지원은 비당권파를 따라 대안신당을 만들어 민주평화당에서 나왔다.
이후 2020년 제 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대안신당은 다시 바른미래당 일부와 민주평화당과 합쳐 민생당을 결성했다.
박지원은 제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소속으로 원래 지역구인 전남 목포에 출마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 37.34%를 득표하는 데 그치며 48.76%를 얻은 김원이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때 민생당은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 국회의석도 얻지 못하며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국민의당 활동
박지원은 국민의당에 입당한 뒤 제 20대 총선에서 원래 지역구인 목포시에 출마해 당선돼 4선 의원이 됐다. 이때 국민의당도 38석을 얻으며 크게 약진했다.
박지원은 제 20대 국회에서 첫 국민의당 원내대표로 합의추대됐다.
박지원은 2016년 4월27일 경기도 양평 한화리조트에서 열린 당선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된 뒤 수락연설을 통해 “18대, 19대에 이어 20대 국회에서 원내대표를 맡게 됐다”며 “후대들이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으나 의원들의 간곡한 얘기도 있었고 내가 수락하는 게 당을 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민의당은 총선에서 약진한 뒤 고무적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선거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사건에 당 소속 박선숙·김수민 의원이 연루돼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때 박지원은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겸하게 됐다.
박지원은 2017년 1월15일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됐다.
이후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박지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민주당과 함께했다.
하지만 탄핵사태에 이후 2017년 제 19대 대선까지 국민의당의 대선 경쟁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과도한 네거티브 공세를 벌이며 민주당 쪽과 사이가 더 벌어졌다.
국민의당은 문 대통령 아들 문준용씨 관련 의혹을 제기하면서 카카오톡 캡처 화면과 녹음파일 등을 공개했는데 대선 이후 이 자료들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민의당이 대국민사과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밖에도 국민의당은 당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문 대통령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당대표로서 당 소속 대선후보인
안철수를 지원해야 했던 박지원으로서도 문 대통령을 거세게 비판하며 ‘친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큰 원성을 들어야 했다.
나중에 박지원이 문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장에 임명되면서 박지원이 아침부터 문 대통령 비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뜻의 ‘문모닝’이란 말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2017년 대선에서 국민의당은 패배했고 지도부가 총사퇴하면서 박지원도 당대표에서 물러났다.
이후 국민의당은
안철수계를 중심으로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지원은 합당에 반대하는 ‘통합 반대파’로 정동영, 천정배 등 호남 의원들과 뜻을 함께했다.
박지원은 통합 반대파와 함께 탈당해 민주평화당을 창당했다.
| ▲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오른쪽), 조명균 통일부 장관(가운데), 북측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2018년 12월26일 오전 개성 판문역에서 진행된 '동·서해선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마친 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정계복귀와 야당 활동
박지원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됐다 사면된 뒤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했다.
선거를 앞둔 2008년 초에 박지원은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전남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이 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되자 박지원은 통합민주당에 전남 목포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통합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결국 탈당해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이후 20대 총선까지 같은 지역구에서 연달아 당선됐다.
18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다시 발을 들인 뒤 박지원은 줄곧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의원 선수는 높지 않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친 이력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의원 선수 이상의 대접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2009년에는 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올랐고 2010년에는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당시 가장 유력한 경쟁자는
김부겸 전 의원이었고
박병석 국회의장도 이때 원내대표 경선에 뛰어들었다. 이 밖에 강봉균, 이석현 등도 원내대표 경선 경쟁자였다.
2012년 19대 국회가 열린 뒤에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이때 당 이름은 민주통합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이 아닌 정치인 박지원으로서 능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진가를 보였다.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군기반장’ 역할을 맡으며 야권 정치세력의 야성을 깨우고 정체성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다.
민주당 의원들을 일일이 출석을 체크하며 원내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특히 인사청문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와 천성관 전 검찰총장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원내대표를 맡았던 1년 동안 5명의 총리·국무위원 후보를 청문회 문턱에서 좌절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무렵 야당은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선거에서 수차례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여당 후보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줘야 했다.
박지원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했다. 이때 경쟁자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박지원은 문 대통령과 전당대회 규칙을 놓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선후보 출마를 염두에 둔 사람은 전당대회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당권과 대권 분리론’, 대표와 최고위원을 따로 뽑는 문제와 관련해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박지원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2015년 2월8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은 41.78%를 득표하며 선전했지만 45.3%를 얻은 문 대통령을 넘지는 못했다. 이때 함께 나왔던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12.92%를 득표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박지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고 2016년 3월2일
안철수와 동교동계가 힘을 합쳐 만든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 ▲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이 2017년 12월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정체성 확립을 위한 평화개혁세력의 진로와 과제'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정계입문과 김대중 정부 활동
박지원은 미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정치에 뛰어든 뒤 정치 인생 내내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본격적 정계 입문은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전부터 줄곧 김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했고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자 박지원도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청와대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지원은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있던 2000년 대북특사로 파견돼 그해 6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하지만 이때 현대그룹이 대북사업권 구입 명목으로 북한에 돈을 보낸 사실이 나중에 특검 수사를 통해 밝혀졌고 이 일로 박지원은 결국 구속됐다가 2007년 사면을 받았다.
△재미교포 사업가
박지원은 정계 입문 전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11월 동서양행 뉴욕지사에 지사장으로 일했다.
이후 미국에서 생활하며 가발사업으로 성공을 거뒀다.
미국에서 뉴욕한인회 회장과 미주지역 한인회총연합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박지원은 한 TV프로그램에서 미국에 있을 때 뉴욕에 건물 5채를 지니고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지원은 미국에 있을 때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고 이때 김 전 대통령의 생활비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과 만남을 계기로 박지원은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