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 지배구조 개편으로 지주회사 최대주주 올라
현대중공업그룹은 2018년 10월 현재 지주사체제 전환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2016년 11월 현대중공업의 비조선부문을 인적분할 하겠다고 발표한 지 약 2년 만이다.
정몽준의 측근으로 꼽히는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이 지배구조 개편을 진두지휘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을 재빠르게 추진하면서 구조조정 등을 우려한 노조의 반발도 있었으나 2017년 2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지배구조 개편 안건을 승인받아 큰 난관 없이 지배구조를 바꿨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의 행위 제한 요건을 만족하기 위해 지주회사인 현대중공업지주(옛 현대로보틱스)의 신주와 자회사인 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 현대중공업의 지분 등을 맞교환했고 순환출자고리도 모두 끊었다.
정몽준은 지배구조 개편으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모든 계열사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현대중공업지주의 최대주주에 올랐다. 2018년 10월5일 기준으로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420만2266주(25.8%)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경영
2014년 조선업황 악화로 현대중공업이 3조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내자 경영을 직접 맡을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복귀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체제를 유지했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과 2015년에 영업손실로 모두 4조8588억 원을 내 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었다. 2016년에 영업이익 3915억 원을 내 간신히 흑자로 전환했지만 2017년에는 일감 부족 등으로 영업이익 규모가 146억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정몽준이 현대중공업에서 직접 경영을 맡은 기간은 채 몇 년이 되지 않는다. 1978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1982년 사장, 1987년 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1988년 정계에 진출했고 이후 현대중공업은 30년가량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돼왔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은 정몽준의 경영능력을 놓고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조선산업이 세계적으로 불황에 허덕일 때 정몽준 사장이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 철탑 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체제에서 고속성장을 했다. 1990년대 후반 현대중공업의 매출은 6조 원 수준이었으나 2011년 53조 원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정몽준은 2013년에 50년 지기였던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을 회장으로 올려 현대중공업의 경영권을 맡겼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해양플랜트에서 대규모 영업손실을 내자 이재성 회장은 취임 1년 만에 경질됐다.
이후 측근인 최길선 전 사장을 회장으로 불러들이고 권오갑 사장을 대표이사에 앉혀 현대중공업의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의 전권을 맡겼다.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은 2015년부터 현대중공업의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이들은 자구계획안을 세운 뒤 비핵심자산 매각과 함께 수천 명의 인력 희망퇴직 등을 진행해 노조와 강하게 대치하기도 했다.
구조조정을 일단락한 뒤 최 회장은 고문으로 물러났고 권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에서 함께 일했던 가삼현 사장에게 현대중공업그룹의 선박해양영업담당 임원을 맡겼다.
△국제축구 행정가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뿐 아니라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도 오랜 기간 맡으며 국제축구 행정가로서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3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올랐고 1994년 피파 아시아담당 부회장에 당선돼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치하는 데 발판을 마련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전에서 정몽준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이용한 총력전을 펼쳤다. 현대그룹의 재력뿐 아니라 디에고 마라도나 전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등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불러내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프레젠테이션에서 1991년 19세 이하 세계청소년대회 때 남북 단일팀 선수단의 사인볼을 들고 나가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정몽준은 한국전쟁 시기에 찍은 흑백 가족사진과 연평도 피격 현장 사진을 프레젠테이션에서 소개해 한국의 현실을 부각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에게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1996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기로 확정되자 “단독 개최 자격이 있지만 피파의 결정을 따르겠다”며 “아시아 단결과 평화, 한반도 통일의 촉매가 되는 월드컵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1996년 12월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한국 측 조직위원회 실무부위원장에 올랐다. 199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정몽준을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했다.
1994년부터 2007년까지 4번이나 피파 부회장에 선출됐고 임기를 마친 2011년 세계 축구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부회장에 추대됐다. 1997년 피파 미디어위원장, 2007년 피파 올림픽조직위원장 등도 지냈다.
정몽준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여러 의미가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이루자 축구협회 회장으로서 축구 발전을 위해 오랜 기간 기여한 정몽준의 지지도 함께 높아졌다.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지가 급등한 것을 보고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이라는 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한때 정몽준은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대선 후보인 노무현 후보를 앞섰을 뿐만 아니라 야당 대선 후보인 이회창 후보를 바짝 쫓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대선 출마의 꿈을 접긴 했지만 정몽준의 30년에 가까운 정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라고 정치권은 바라본다.
△정치인 정몽준
정몽준은 제13대 국회의원부터 제19대 국회의원까지 7차례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서울시장과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을 정도로 무게감을 인정받았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직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계에서 입지를 다진 뒤 축구계 행정가로서 면모를 주목받아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하면서 꿈을 키웠지만 서울시장 낙선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 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1996년과 2000년, 2004년에는 모두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뽑혔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앞두고 창당했던 국민통합21을 2004년 해체한 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래 지역구인 울산 동구가 아닌 서울 동작을로 옮겨 정동영 통합민주당 후보를 꺾고 6선에 성공했다.
2008년 7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2009년 9월 박희태 대표가 사퇴한 뒤 당 대표 자리를 승계했다. 여당 대표를 지내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합리적 판단이라고 평가하고 인도적 지원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대북정책에서 당청 간의 파열음을 내기도 했다.
2010년 제5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자 당 대표에서 물러났다. 당시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 당선자와 서울 25개 구청장 당선자 모두 민주당에 밀렸다.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정몽준이 여야관계를 부드럽고 조화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정치발전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평가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7선 국회의원에 올랐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과 함께 현역 최다선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2014년에 제6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당내 경선에서 김황식·이혜훈 후보를 꺾고 최종 후보로 선출돼 의원을 내려놓고 선거를 치렀으나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큰 표차로 밀려 낙선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했고 2016년 말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새누리당에서 탈당했다.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 ▲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2018년 8월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아산재단 창립 41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
△아산재단 활동
정몽준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가는 의미에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2011년 8월16일 정주영 명예회장 별세 10주기를 맞아 범현대가와 함께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몽준은 현금 300억 원 등 사재 2천억 원을 출연했고 현대중공업 6개 계열사가 2380억 원을 출연했다. 범현대가인 현대산업개발, KCC, 현대백화점 등을 포함해 모두 5천억 원의 재원이 마련했다.
200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설립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의 8천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아산나눔재단은 ‘기업가 정신’을 확산하기 위해 기업가 정신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비 창업가를 발굴하고 창업 인프라를 지원하는 청년 창업 지원사업과 비영리 생태계를 이끌어갈 사회혁신가 육성사업 등도 진행한다.
정몽준은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몽준은 아산나눔재단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며 “창조적이고 역동적 인재가 필요하게 되고 나눔의 미덕이 소중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어 이런 시대상에 맞춰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정몽준은 2001년부터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1977년 현대건설 창립 30주년을 맞아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건설 주식의 절반을 내놓아 설립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는 설립취지에 따라 의료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과 아산나눔재단은 현대중공업그룹 주요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018년 5월1일 기준 아산사회복지재단은 현대중공업 지분 2.44%, 현대미포조선 지분 0.43%,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1.87%, 현대건설기계 지분 2.41%,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 지분 2.41%를 들고 있다.
아산나눔재단은 현대중공업 지분 0.62%, 현대오일뱅크 지분 0.25%,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0.48%, 현대건설기계 지분 0.62%,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 지분 0.62%를 보유하고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정몽준은 축구계에서 쌓은 업적과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바탕으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대선을 완주하지 못했다.
그는 국민통합21을 만든 뒤 2002년 9월에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두 자릿수 이상 지지율 격차로 크게 따돌리고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추격하며 양강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를 꺾기 위해 노무현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여론조사에서 밀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됐다.
정몽준은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 경선 TV토론에서 시종일관 공세적 태도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중장년층에게 역효과를 불러왔다. TV토론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여론조사에서 TV토론 다음날엔 앞섰지만 이틀 후부터 노무현 후보에게 역전을 당했다. 결국 2002년 11월24일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기획본부장은 이를 두고 “반응이 늦게 오는 중장년층을 노린 전략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대북 대미 외교정책에서 의견 차이를 보인 것이 표면적 이유였다. 그러나 차기 대선후보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단일화 파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무현 후보는 한밤중에 정몽준의 자택을 방문해 마음을 돌이키려 했으나 만나주지 않았고 회동은 결렬됐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는 엄청난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몽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김흥국씨는 이후 “‘단 하루를 못 참았느냐’는 비난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말했다.